행여 조직?성과란 이름 아래 사람?가치의 의미 묻혀서는…
좋은 직장 만들기가 첫 임무
못 마시는 폭탄주를 마셔야 했던, 너무도 힘들었던 그날 밤을 기억합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한 영업인데 이까짓 것 못할까 싶었습니다. 그날 늦은 밤 귀갓길에서, 취기가 올라 흐릿해진 정신이 제게 문득 묻더군요. “이게 내가 추구하던 삶이 맞는가?”
술이 확 깨더군요.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하루를 꼬박 생각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영업부서 직원들도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지. 행여 조직과 성과라는 이름 하에 삶과 존재가 무시되고 있는 건 아닌지, 그 정점에 나와 나의 탐욕이 있는 건 아닌지.
그날 이후 매출 1조의 기업인이 되겠다는 제 목표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저와 임직원들이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그리고 “진양곤과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퇴직의 변을 듣는 게 목표가 되었지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실직하셨던 날의 한숨과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또한 기억합니다. 덕분에 한 가정에서 직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저는 잘 압니다. 가장에게는 존재의 표현이고 가족에게는 생존이며 생활이지요. 이처럼 소중한 우리 모두의 직장을 더 좋게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기업인으로서의 제 첫 번째 임무여야 함을 늘 확인합니다.
물론 그 다음 질문은 ‘어떻게?’여야 하며, 이는 전략의 문제일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저의 경영철학에 의존합니다. 권한의 크기와 무관하게 오너로서의 철학과 의지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이러한 현실은 제게 막중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한 세상이며, 제 생각이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저의 경영철학은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성격이 모질지 못해서 모진 말을 잘 못합니다. 또한 털털한 성격 탓에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단기간의 효율적 성과에는 대단히 서툽니다. 사업 분석과 예측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학습이 제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한 오너가 있는 회사임에도 좋은 성과들이 이어진다면 그건 이러한 저의 결함을 잘 이해해주고 훌륭하게 메워주는 임직원들 덕분일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잘 하는 것도 있는 듯합니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과 결점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때문에 다양한 견해에 열려 있습니다. 당연한 귀결로서 권한은 지위로부터가 아니라 더 나은 고민들과 식견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업가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경영 교본은 말합니다. 일견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성과 지상주의가 과정을 은폐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데 우리는 익숙합니다. 문제는 그 목표의 대부분이 계량화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목표 도달을 위한 우리의 경로사고가 효율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가치의 중심에 있어야 할 노동과 삶이, 나아가 존재가 소외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효율성과 성과 지상주의가 가져온 몰락과 폐해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음은 저의 장점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과 ‘진정한 가치’가 일상이 된 문화만이 기업의 지속성을 담보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업문화가 우리 회사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를 소망합니다.
일전에 우리 회사의 구명정이 공중파 TV에 소개되었습니다. 국내 유일의 구명정 제조회사로 지난 40년간이나 구명정을 수출해 온 회사가 이제서야 조금 알려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더 기뻤던 것은 방송에 나온 직원의 인터뷰였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구명정이 사용되지 않고 수명이 다하길 바란다”는 취지의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만든 구명정의 품질과 가치에 제가 어찌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구해낼 바다 위 생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저희 울산 공장에 크게 적혀 있는 문구입니다. 이토록 선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어찌 계량화해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이 ‘올바른 경영의 길’인지 저는 궁금합니다. 물론 발을 땅에 딛지 않고 설계하는 미래는 허망하겠지요. 때문에 저는 현실 감각에 충만한 임원들과 충분한 논의를 통해 가치와 현실의 경계에서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경영철학의 중심은 역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진심이 왜곡될 때는 많이 억울했고 서운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피해 경험이 가해에 대한 성찰로 확장되는 건 의외의 성과입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상처 준 일은 없는지 살피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와 경험은 ‘사람이 가장 무섭지만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인적 구조조정은 결단코 선제적 경영개선 조치일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이 희망일진대 그런 사람을 버리는 건 희망을 버리는 것이며, 희망을 버리는 건 모든 걸 버리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신뢰가 만들어낼 결과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확고할 것이라는 믿음이 제겐 있습니다.
순수 제조업의 경우 새 제품을 구상하고 개발·양산해 실적에 반영되기까지는 대체로 5~6년이 걸리더군요. 1년 내 성과를 원하는 시장의 요구에 부응할 도깨비 방망이가 제겐 없습니다. 오해는 시간으로 인해서만이 극복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난은 결과로서만이 반박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 데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요즘은 비록 목계지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난과 칭찬에 평상심이 흔들리지 않는 제 자신을 자주 발견합니다. 저희 각 회사의 임직원들이 열정을 갖고 추진하는 많은 것들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외풍을 견뎌내는 힘이고, 그게 의사결정의 정점에 있는 제 역할임을 이제는 잘 압니다.
5년전 美LSKB 추가 투자 때 ‘표적항암제’ 모르는 분야지만 그분들의 열정을 믿고 결정 사람에 대한 확신이 결실로 제 경영철학을 입증하고 강화하는 좋은 경험 하나가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표적항암제를 개발해온 신약 개발회사 LSKB가 올해 초 에이치엘비의 자회사가 되었습니다. 인공간 개발회사에 이어 표적항암제를 개발한 회사가 자회사가 됨으로써 40년간 조선업을 해온 에이치엘비가 바이오 기업으로 재평가되는 ‘사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시계바늘을 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에이치엘비는 조선업 불황으로 적자가 지속되고 있었고 신규사업으로 유리섬유파이프를 개발하고 있었기에 운영자금마저 빠듯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서브프라임 위기로 투자마저 꽁꽁 얼어붙어서 저와 저를 믿는 지인들의 투자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LSKB도 자금이 어려웠나 봅니다. 에이치엘비에 추가 투자 요청을 해 왔습니다. 언제 성과가 나올지 모르는 신약개발 회사에, 우리도 어려운데 추가 투자 건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서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미국 출장 길에 올랐습니다. LSKB의 경영진과 만나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귀국 후 임원회의에서 제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표적항암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었으나 저는 여전히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순수함과 열정에는 확신이 갑니다. 그분들을 보고 한번 더 투자합시다.”
어렵사리 임원들을 설득한 끝에 추가 투자를 함으로써 지분을 늘렸습니다. 어려운 상장회사가 미국으로 투자금을 보내는 것에 대해 온갖 억측이 난무했습니다. 일부 주주들의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은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이후 신약개발에 매진한 LSKB는 글로벌 제약업계가 주목하는 성과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나비가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수심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던가요. 바이오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있었다면 신약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를 잘 알았을 것이고 투자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아는 것이 한계가 되기도 하지요. 전문적 식견이 없는 자가 어찌 산업과 기술을 평가하고 판단하겠습니까? 그래도 결정해야 한다면 결국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요. LSKB에 대한 우리 회사의 ‘무모한’ 투자는 결국 ‘사람’에 대한 확신이었던 것이며, 그 결정이 옳은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는 LSKB 임원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최근 우리 회사의 시장 가치가 기본 실적을 훨씬 뛰어넘고 있습니다. 물론 지난 40년간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세계적인 품질을 갖춘 구명정을 제조하고 있고, 7년간의 노력 끝에 유리섬유 파이프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 인공간 개발을 위한 17년간의 노력, 표적항암제 아파티닙을 위한 10여년간의 열정이 반영된 결과이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실적을 훨씬 뛰어넘는 기대가 반영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장의 기대와 실적의 차이만큼이 저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들이 느껴야 하는 책임의 크기임을 잘 알고 있으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좁히는 부단한 노력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며, 어떤 회사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땀이 필요할 뿐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열정적인 노력들이 좋은 결과로 완성되리라는 믿음, 그러한 확신이 만들어내는 힘찬 발걸음들이 가득한 회사. 이것이 우리 회사의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일과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공감되고 기업문화로 확산되며 신뢰로 뿌리내리기를, 권한은 지위가 아니라 열정과 식견을 가진 현장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최종 책임자로서의 제 역할은 모두가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버텨주는 것이어야 함을 바라고 새기며 에이치엘비에서의 오늘 하루를 보냅니다.
◆진양곤 에이치엘비 회장 프로필
1966년 1월 14일 출생
1991 연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1991~1994 부산은행
1994~1998 평화은행
1998~2003 제이앤리파트너스 대표
2004~2005 골든라이트 대표
2008 하이쎌 인수(2013년 매각)
2008 대륙산업 인수 – 바다중공업으로 개명
현재 에이치엘비 회장, HLB Networks·바다중공업·현대요트·고션·펭귄오션레저·라이프리버 이사
◆에이치엘비 연혁
1975년 3월 현대정공 자회사 경일요트 설립. 세일요트 30~44ft급 생산
1982년 2월 현대그룹 자회사 현대정공과 합병
2000년 6월 현대정공으로부터 분사, 현대라이프보트㈜ 설립
2004년 11월 제41회 무역의 날 500만달러 수출의 탑 수상
2006년 10월 구명정 이탈장치 국산화 기술개발 및 MED 공장승인 획득
2007년 12월 벤처기업 인정(연구개발 전문기업) 획득
2009년 12월 1000만달러 수출의 탑 수상
2010년 11월 지식경제부 구명정 세계일류상품 선정
2012년 12월 2000만달러 수출의 탑 수상
2013년 1월 모회사 에이치엘비(주)와 합병
이투데이